수다스러운 소녀 시절

비가 온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있는 이 집, 루씨는 조금만 비가 와도 요란한 소리를 낸다.
룸메와 함께 있을 때는 빗소리가 정겨웠는데
오늘은 살짝 무섭기도 하다.

저녁에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10시가 넘어 일어났다.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티비에선 피디수첩이 나오고 있고, 오늘 함께 있던 친구들은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집회에 참여한단 전화를 한다. 나갈까 하다가 몸이 무거워 참는다. 오랜만에 두통에 시달린 오늘. 아마 해야할 일들이 몰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못되게 내뱉었던 나의 말들 때문에 몸이 시위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루종일 원인 모를 이유로 옆구리가 뻐근한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일지도.

사람들이 연이어 거리로 나오는 동안 나는 그 근처에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때때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기는 했으나 그 안에 끼지 못했다. 오늘 읽은 어떤 글에서 '냉소적인 좌파'라는 말이 나왔는데, 나는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냉소적인 좌파에 속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집회를 조직해보거나 앞에 나선 적은 없지만 많은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대부분은 패배(이 말이 맞는 말은 아니겠으나)를 전제하고 행동했다. 집회에 나가더라도 '그래봐야 어차피'라는 생각들이 나를 감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면서는 '그들'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게 더 강해졌고 그 공간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 많았지만 역시 '그래봐야 어차피'라는 생각뿐, 뭔가 해보려고 한 적은 별로 없다. (아마 내가 들소리에서의 활동을 즐겁게 느꼈던 것은, 뭔가 해 볼 수 있어서가 아닐까. 뭔가를 계획하고 행동하고 그럴 수 있었으니까.)

며칠 전 버스에서 깅과 집회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깅은 지금 이렇게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힘에 대해서 얘기했고 나는 이렇게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계속 저럴까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내비쳤다. 깅은 그게 경험의 차이가 아닐까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경험의 차이라기 보다, 내가 그렇게 비난하던 지도자적 자세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라면 이런 감정일 거다를 생각하지 않고 이미 그들,인 그들.

운동권이 아니면서 운동권인 나와 그들과 닮아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와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내가 있다.
어느 순간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말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말들, 요즘에 그런 순간들이 많아져서 슬프다. 자꾸만 반성을 하게 되는 요즘. 냉소적인 좌파 말고, 자꾸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즐거운, 감성적인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그런 좌파라고 쓰다가 멈칫...ㅎㅎ)

거리 시위에 대한 글이나 인터넷 생중계를 보면서 제일 재밌는 건, 경찰들이 막으면 다른데로 간다는 거였다. 그들을 뚫고 지나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시위대를 보니 울컥하는 것들이 있다. 마음을 움직인다는 건 그런 것들. 울먹이며 어떻게 지금 경찰이 이럴 수 있냐고 말하는, 옷이 찢겨진 남자나 '우와, 진짜' 이런 말들을 섞어가며 잘 좀 찍어달라고 카메라에 부탁하는 사람들에게서 진심이 느껴진다. 그건 정해진 발언순서에서 정제된 말들로 하는 것과는 다른 진심이 느껴진다.

오래된 얘기지만,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건 스무살 즈음이었다. (내가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나중에 일기장을 보고 알았다. ㅎㅎ) 학교 로비에서 대우자동차 폭력진압에 관한 영상을 하루종일 틀어놓고 있었는데, 아마 그걸 보고 많이 울었던 거 같다. 근데 재밌는 건 그런 걸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한 게 아니라 속고 싶지 않아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일기장에 써 있는 멘트는 이것.
'적어도 나는 진실을 아는 거잖아'
(아마 그 전까지 많이 속고 살았던 듯;;)
그런데 오히려 카메라를 들고 나서 그런 마음들은 많이 잃어버렸다. 내가 그 자리에 있고 싶은 욕망 같은 것들. 일이 일이 되면 안 되는데, 내가 선택해 놓고도 자꾸 이 아름다운 행위들을 귀찮은 일로 만드는 악마가 마음 속에 있나보다.(책임 전가;;) 군산 여행을 기점으로 몸에 기운을 좀 충전해야 겠다. 쌓인 것들도 털어내고 싸우든 울어버리든 상처들도 딱지를 만들어줘야지.

쓰는 동안 비가 그쳤네.
아무래도 정말 외로운가봐. 쓸데없이 주절거린 걸 보면.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