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러운 소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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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5년도 지난 일이다.
나는 그 때 경기도 산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신도시가 되어 삐까번쩍 커졌지만 그 때만 해도 신도시를 막 건설하던 중이라 산과 논과 시장과 공장이 섞여있던 동네였다. 나와 동생, 그리고 몇몇 친구들은 논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산으로 삐라를 줏으러 다니기도 하고 그러다 우연히 수정 같은 걸 주워서 자랑하기도 하고 귀뚜라미도 잡아서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던, 나름 순박한 아이들이었다. 나는 동생이 함께 있으면 대담한 척 하느라 동네 공터에 불도 지르고, 쌈도 벌이곤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간이 작아서 학교에선 착하고 올바른 학생이었다. 정말 그랬다. 잠을 못 이겨 지각을 하던 것 빼고는 학교에선 큰 말썽 부린 일이 없었다.
4학년 때 일이었다.
그 때 담임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생각하면 김을동을 닮았다. 볼 양쪽에 축 쳐진 살이 있던 게 인상적이었다. 늘 두꺼운 화장을 했고(그 때 그 시골학교에 그런 선생은 흔치 않았다) 정장을 입고 다녔으며, 학부모 모임을 자주 만들었고 부모에게나 애들에게나 강남 8학군 이야기를 하며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대략 이런 얼굴..)

착하고 배운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어린 날의 나는, 그래서 공부도 곧잘 했고 4학년 당시에는 반에서 5등 정도 되었다. 특별히 칭찬해주는 부모도 없고 하여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나 높은 등수에 대한 희열 두 가지 모두 없었다. 그냥 재미있었다.
그 때 무슨 시험이 있었다. 월말고사였나. 근데 그 시험 이틀 전에 담임이 자리를 바꾸었다. 1등과 꼴지, 2등과 꼴지에서 두 번째, 3등과 꼴지에서 세 번째... 이런 식으로 성적 등수순으로 앞뒤 다섯명씩을 짝을 지워 앉혔다. 대체로 앞 등수 아이들이 여자, 뒤가 남자 아이들이었다. 담임은 책임지고 짝을 공부시키라고 말했다. 그냥 그런 줄 알았다.
시험 당일, 담임들은 서로 다른 반으로 들어가서 시험 감독을 했다. 아침 조회가 끝나고 나가기 직전, 그녀는 내 책상 앞으로 와서 그 무서운 얼굴을 들이대고 내게 말했다. "쟤 성적 안 좋으면 니 책임이다."

나는 얼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짝과 나 사이에는 가방 하나와 가림판이 올려져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해야 했던 나는, 전 시험 모든 과목의 내 답안지를, 천천히 그 애에게 보여주었다.
너무너무 떨렸다. 우리 반에 들어와 시험감독을 하던 선생님에게 걸릴까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다른 애들도 이렇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했는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시험을 망쳤다. 재미도 없었다. 그 전에는 시험을 보는 게 내가 뭘 알고 있는지 그런 걸 맞추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고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시험은 내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시험을 망쳤지만 그 아이는 성적이 조금 올랐고, 다른 아이들도 잘 보여줬는지, 잘 가르쳐줬는지 그 시험에서 우리 반은 전교 1등을 했다. 담임은 기뻐했지만 나는 너무 괴로웠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되지 못했다. 시험이 무서워졌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조금 오바하면 나는 그 때부터 삐뚤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이름도 웃긴 이 일제고사를 다시 부활시킨 고 놈의 쉐이는
선거 때 티비 토론회에 나와서도 졸라 당당하게 '내가 바로 일제고사를 부활시킨 사람입네'하고
떠들어댔다.
그 당당함이 우스웠지만, 그가 다시 당선된 서울에 살고 있는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어떤 아이는 나처럼 될 것이다. 아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던 아이가, 일렬로 등수를 매기는 저딴 시험 때문에 그 즐거움을 잊고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사람을 볼 때 등수에 따라 그 급이 매겨질지도 모르고, 저딴 시험 때문에 부모에게 혼나고 학원을 하나 더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왜 학교를 자꾸 배움을 싫어하게 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할까.
뭔갈 알아가는 건 참 즐거운 일인데 ...

백지 답안을 낸 용기 있는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일제 고사 반대를 위해 애쓰는 청소년 활동가들이나 선생님들에게도.
진짜 한 80%정도가 백지를 짠 내줘야 될텐데....

근데 뭐.... 사실 지금 일제고사만이 문제겠는가.....에후
열 받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