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2008. 5. 23. 17:05
약간 어려운 자리.

약속시간 전에 아빠를 미리 만났다. 오랜만에 둘이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샤핑을 했다. 아빠는 재킷을 사고, 나에게는 구두를 하나 사 주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 났다.
국민학교 6학년에 들어갈 무렵.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 전까지 아빠와 함께 살지 못하다가, 함께 살게 된 첫 해였다. 그 전에 살던 동네를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고, 그 곳은 그 전까지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른 동네였다. 집들은 으리으리했고, 집 앞엔 고급 부띠끄가 있었다. 나는 작았고, 그 곳은 낯설었다. 전학을 가고 한 달쯤은 나는 그들에게 놀림거리였을 것이다. 내 옷은 그들의 옷과 달랐고, 나는 그들이 어떤 걸 하고 노는 줄도 몰랐다. 점심시간마다 조용히 혼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책을 읽곤 했다. 눈은 책에 가 있으면서 머리 속은 나도 저 애들처럼 되고 싶다고 저런 옷, 저런 신발, 내가 들어보지 못했던 어떤 브랜드의 물건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 그래도 아직 아이였으니까 한 달쯤이 지나고 나선 그 애들과 어울릴 순 있었다. 여전히 부러웠다.

그 때 아빠랑 백화점에 간 적이 있었다.
뭘 사러 갔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기억나는 장면은 하나. 아빠 팔에 매달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길, 멀리 청치마 하나가 보였다. 치마가 특별히 예뻤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 브랜드의 옷을 입고 다니는 친구들이 기억이 났고, 나는 아빠 손을 이끌고 그 매장에 갔었다.
그냥 무조건 갖고 싶었는데 갖고 싶다고 하지 못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백화점에서 옷 사는 건 그야말로 '사치'라고 생각하던, 아니 겉모습을 꾸미는 것 자체에 대해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던 부모였다. 내가 그 옷을 갖고 싶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치마를 들여다보며 빤히 서 있으니까 아빠는 갖고 싶냐고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아빠는 별다른 물음 없이 그 옷을 사 주었다. 그 때까지 내가 살면서 샀던 옷 중에 제일 비싼 옷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아빠는 그 때보다 많이 늙었고, 그 때보다 덜 무서워졌지만, 오늘 아빠의 얼굴은 그 날의 그 얼굴과 닮아있었다.

그 '베네통' 치마, 아껴서 오래오래 입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