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러운 소녀 시절

아이키우기 +1

어제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얼굴을 본지는 한참 되었지만 종종 어린이집 문제로 통화를 한다. 몇 년 먼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보낸 선배랍시고 조언 같지 않은 조언들을 하는 게 내 역할. 전화를 끊고 나면 어딘가 늘 찝찝하다. 아마도 나는 그 시절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거 같다. 많은 감정들과 사건들이 뒤섞여있는데, 굳이 꺼내보고 싶지 않은, 그냥 아이에게는 좋은 시간이었겠지, 지나고 나니 다 좋았던 거 같아 라며 눙쳐버리는. 언젠가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처음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가게 된 건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였다. 아이는 돌을 맞이하기 며칠 전부터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다. ‘그 어린 것을...’이라고 다들 한 마디씩 붙였지만, 나는 아이를 계속 데리고 있을만한 힘이 없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조금 더 가볍게 생각했다면 좋았을 걸 싶은 아쉬움은 남는다. 그 땐 모든 게 너무 어려웠고, 그저 다른 전문가가 아이를 맡아준다면 나보다는 훨씬 나을거라는 생각뿐이었다. 집 근처 아파트 단지에 있던 어린이집은 나쁘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이 손주를 돌보듯, 아직 기저귀도 떼지 못한 아이를 봐주었고 아이도 비교적 잘 적응했다. 그런데 세 살때 바뀐 선생님과 아이가 잘 맞지 않았다. 아이는 점점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했고, 어차피 네 살까지밖에 다니지 못하는 영유아 어린이집이었기에 다른 곳을 알아보기로 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숲 유치원처럼 자연 놀이를 많이 하는 유치원이 있어 신청할까하던 때에,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며 수다를 떨다가 그 숲 유치원 바로 옆에 좀 다른 어린이집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집에 와서 검색을 해보니 홈페이지가 있었고 때마침 설명회 겸 면접(!)이 있다고 해서 신청. 그 때까지도 정말이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면접을 하러 어린이집을 찾아가는데 논길 골목골목에 있는 걸 못 찾아서 몇 번이고 전화를 했고, 무엇을 면접하는지도 몰라서 우리 아이는 좋은 아이란 말만 하고 돌아왔는데, 세상에나 탈락을 하고 말았다. 그 때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두셨고, 아이가 새로 온 선생님을 좋아해서 그냥 넘어간 채 네 살 까지 쭉 다녔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보냈던 선배에게 물어보니 면접은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부모를 보는 거라고, 열심히 어린이집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사람을 뽑으니까 바쁘다고 할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어필을 했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

 

그 사이, 그 때 진행하던 강의의 수강생분이 그 어린이집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다음 해 면접에서 나름 공략면접 (트럭 운전 할 줄 안다, 노가다 잘 한다,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다 등등)을 한 결과 합격했다. 터전(공동육아 하는 사람들이 어린이집을 부르는 말)에서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내가 왜 그렇게 애를 써서 여기 들어오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을 했었는데... 지금은 이걸 왜 이렇게 자세히 쓰고 있는지를 모르겠네? ㅎㅎㅎㅎ


여튼 그렇게 아이의 다섯살부터 시작된 공동육아에는 추억과 상처와 성장과 배움과 미움과 이런 것들이 마구 뒤섞여있다. 

사람들 사이에 그렇게까지 밀접하게, 그것도 '나의 일'이 아닌 것으로, 함께 지내야했던 경험이 없어서 그 시절은 '어쨌든' 특별하다. 

조금씩 그 조각들을 적어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