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러운 소녀 시절

오늘 해야 했던 모든 일들과 일정을 다 취소하고 하루종일 뒹굴거리다가 룸메를 만나러 모 학교에 갔다. 4월, 한창 벚꽃으로 가득할 그 곳. 초중고 12년에 대학 5년까지, 17년 가까운 시간동안 3월을 기준으로 새해가 시작된 탓에 3월부터 나는 그렇게 죽자사자 술을 마셔댄 건지도 모른다. 봄은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혹은 날카로운) 바람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그 바람에 꽃향기를 실어다주기도 하니 야외에서 낮술을 마시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계절이다.
4시즈음 찾은 학교는 북적거렸다. 아직도 바람이 찬 우리집 근처와 다르게 벚꽃이며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라일락까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요즘 대학생들은 다 도서관에서 쩔어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잔디밭에 앉아 술이나 커피(내가 학교에 다닐때는 커피 마시는 인구란 찾아볼 수 없었는데 ㅠ)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다. 짜장면도 시켜놓고, 떡볶이를 먹기도 하고, 화창한 날에 걸맞게(?) 아사히나 하이네켄을 들고 마시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여럿이 모여 소리지르며 노는 게임종족과 둘셋이서 오붓하게 캔 하나 들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 유독 소주병을 자랑스레 꺼내놓고 가장 어두운 곳에 앉아 술을 마시는 무리가 내눈에는 가장 돋보였달까.

꽃그늘 아래선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花の陰あかの他人はなかりけり

라고 일본의 모 시인이 오래전 말했다시피
꽃그늘 아래서 술 마시는 그들은 모두다 즐거워 보였다.
몸인지 마음인지 어느 한 쪽은 파삭 늙어버린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하고, 그 학교 앞 가장 어두침침한 지역의 추어탕 집에서 소주를 들이켰다. 요즘은 왜그리 추어탕이 먹고 싶은지, 들깨와 산초를 넣어 후루룩 먹고 나면 꽃그늘 아래 부럽지는 않았으나, 이리도 화창한 날에 실내 구석에서 (보기에는) 우중충한 음식에 참이슬 오리지날을 먹는 내가, 조금은 아저씨 같았다.

이 짧은 휴가가 끝나면, 휴가처럼 일하며 남산 자락에 올라 녹두전에 막걸리를 들이키리라,
라고 결심하는 나 역시, 조금 많이 아저씨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