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호어스트의 포스트잇2009. 4. 13. 03:34
요며칠 많이 걸었다. 날씨는 갑자기 더워졌고, 주말엔 여기저기 꽃구경인파가 몰렸고, 여성영화제에는 사람이 그득거렸다.
약간 화가 났던 영화 한 편을 보고, 신촌에서 아현까지 걸었다. 지하철역으로는 고작 두 정거장. 밤 기운은 낮의 후덥지근함보다는 나았다. 정작 하려던 얘기는 걷는 동안에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걷는 게 좋았다.
다음날은 사람들로 가득찬 남산길을 혼자 걸었다. 내가 버스보다 빨리 걸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좁은 인도에 사람들이 가득하고, 버스 정류장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걷다가 새 전화기로 사진을 찍었다. 해 질무렵의 남산은 참 좋았다. 몹시도 더웠던 집이었지만, 해 질 때만큼은 너무나 예뻤다. 교회 십자가 너머로 보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게, 우리들의 함께 살기의 낭만적인 시작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시작의 설렘은 이제 생활의 익숙함이 되었지만, 아마 아주 오랜 후에도 남산 자락에 있던 그 집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곱등이와 거미와 모기와 쥐며느리의 천국이었지만, 우리에게 특별했던 곳.
걸으면서 천천히 많은 것들을 보는 것이 즐겁다.
이런 저런 생각들도 많이 하게되고, 각종 아이디어들도 피어오르고, 가끔은 블로그에 포스팅할 거리도 생각하지만, 대체로 집에 돌아오면 퍼진다. 집과 일터가 걸어갈 수 없는 거리라는 것이 새삼 슬프다. 지하철과 버스에 실려 집까지 밀려오면 너무 지쳐버린단 말이지. 배만 고프고...
남산을 걸어내려가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여성영화제에 갔다.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를 봤는데, 참 좋았다. 같이 본 나비도 계속 울었다고 했는데, 나도 계속 울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굉장히 위로 받은 느낌이 든 나머지 진보신당에 입당을 할까를 고민하기까지 했다. ㅎㅎ 영화에 대한 얘기는 좀더 기운이 나면 다시.
봄이니 좀 더 신나게 걸어보자.
+>
루씨에서는 요 이쁜이도 만났으니 후후. 여전히 말썽쟁이라 하루 한 번은 혼나지만, 그래도 내 생애 다시 없는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다. 이 아이에게 내 다리가 편안한 공간이라는 것에도 이제 조금씩 익숙해 진다. 아침마다 깨우는 통에 정신 없긴 하지만.
위 사진은 잠들기 직전 룸메의 다리사이에 자리를 잡고 이쁨을 뽐내고 있는 수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