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러운 소녀 시절

오늘은 조금 더 늦은 시각.
피곤하고 지치는 하루였다.
몸은 아프고 일은 많고 가야할 곳들은 여전히 멀었다.

지하철을 타고 사람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자거나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꺼내 고스톱을 친다.
사람을 볼 때라곤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는 동대문운동장에서 뿐이다.

5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은 두 번에 계단과 한 번에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다시 한 번에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야 한다.
계단을 오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 순간
나는 한 남자를 보았다.
낯이 익은 얼굴.
예전에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똑같은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키가 큰 한 백인 남자.
그는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내가 정지한 상태로 저 위까지 올라가는 동안
빨개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은,
계단 가장 아래에서 푸욱,
하고 한숨을 쉬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다시 또 빨개진 얼굴로.

계단에는 휠체어를 옮길 수 있는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리프트 맨 위에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공익근무요원이 있었다.
위아래를 번갈아보며
위에 도달하면 재빨리 발을 내딛어야만 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며
나는 결국 다시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게 요즘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