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러운 소녀 시절

1.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형- 일어나, 하고 아주 많이 시끄럽게 외치는 내 알람 속 원빈의 목소리를,
꽉 채워 다섯 번 듣고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회의에 지각하게 생겨서 부랴부랴 세수만 하고 무거운 짐가방을 정리도 못한채 집을 나섰다.
운동화를 찾지 못해 구두를 신은 채 뛰었더니 발은 아프고
아침에 물 한 모금 못 마셔 목이 탔다.

2.
모니터링 때문에 찾아간 교육 상영회는
장애를 가진 청소년들이 모인 곳에서 이루어졌다.
놀이방처럼 생긴, 장판이 깔린 그 곳에서 본 풍경은
한편으로 아름다웠고 다른 편으로 끔찍했으며 또 다른편으로는 슬프게도 진지했다.
대부분의 장애인 복지관이 가지고 있는 서늘하고 닫힌, 고립된 기운이 나를 더 기운 없게 만들었다.

3.
두 끼를 걸렀다. 드문드문 빵을 먹은 것이 전부.
내내 서 있어야 하는 지하철에서는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 신도림에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늦은 것도 아닌데 나는 또 달려서 겨우 2호선을 갈아탔다.
어제부터 종일 전화기가 싫었던 것은 아마 외로워서일거라고
뛰면서 잠깐 생각햇다.

4.
문래역을 지난 지하철이 덜컹거리며 멈춰섰다.
발제준비때문에 졸린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책을 덮고 이어폰을 빼고
지하철 속 세계로 들어섰다.
'사상사고로 인해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들 께서는 안전하게 객실에서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낯익은 음성은 낯설게 들렸다.

5.
시작은 몇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호기심을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무리지어 지하철의 맨 앞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눈 먼자들의 도시> 가 떠올랐다. 그들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다음은 구급대원 몇 명이 지하철을 가로질러 맨 앞 칸으로 갔다.
처음 몇은 뚜벅뚜벅, 그 다음 몇은 랜턴을 들었고, 그 다음 몇은 들것을 들었다.
그 뒤를 따르던 한 남자.
그는 긴 머리에 때가 탄 얼굴을 하고 보라색 몸빼 꽃 무늬 바지에 갈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구급대원 뒤를 다급한 얼굴로, 절뚝이며 따라갔다.
그의 손에는 구겨진 노란 종이가 들려있었다.

6.
20분간 열차는 멈춰 서 있었다.
간간히 지나가던 맞은편 열차 속 사람들의 눈빛은 맨 앞칸을 향하던 사람들의 그것과 닮았다.
그들의 눈빛에서 놀람과 공포를 읽어내려는, 이쪽의 지하철 속 사람들의 그것과도.
10여분이 지난 후부터 시작된 사람들의 짜증섞인 목소리는
30분이 다 되어가자 화- 혹은 체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맨 앞칸에서 돌아온 한 늙은 남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자랑스레, 큰 소리로, 온 객실에 들리도록 이야기했다.
'아직도 시체를 다 못 찾았대. 사지가 다 찢겨서, 여잔데..'
자리에 앉아있던 몇몇의 어린 여자들이 그만하세요, 하고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상사고..로 인해 현재 정차하고 있습니다..... 마무리가 되는대로 출발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방송을 하는 목소리는 잠깐씩 멈춰섰다. 호흡을 고르기 위해서인지 울먹임을 삼키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죄송합니다...'

7.
어두운 창 밖 터널로 가끔씩 랜턴의 빛이 비춰졌다. 바쁘게 구급대원들은 불빛을 돌려댔다.
사람들은 여전히 짜증을 냈지만 여전히 웃기도 했다. 혼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화기를 들었고, 동행이 있던 사람들은 쉴새없이 이야기를 했다.
35분이 지나고 열차는 출발했다.
덜컹.
차량은 한 두번 앞뒤로 움직이더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역에서 3번 객실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렸다.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짜증을 내며.

8.
어쩌면 사람들은 바쁜 것이 아니라 다들 그냥 외로워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남자의 손에 들렸던 노란 종이도
스피커에서 나오던 낮은 한숨 소리도
누군가에게 말하는지 모르겠던 그 짜증섞인 목소리들도. 모두다.
열차가 덜컹거릴때마다
그녀의 시체를 밟고 지나는
꿈을 꾸었다.


오늘은 조금 더 늦은 시각.
피곤하고 지치는 하루였다.
몸은 아프고 일은 많고 가야할 곳들은 여전히 멀었다.

지하철을 타고 사람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자거나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꺼내 고스톱을 친다.
사람을 볼 때라곤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는 동대문운동장에서 뿐이다.

5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은 두 번에 계단과 한 번에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다시 한 번에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야 한다.
계단을 오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 순간
나는 한 남자를 보았다.
낯이 익은 얼굴.
예전에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똑같은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키가 큰 한 백인 남자.
그는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내가 정지한 상태로 저 위까지 올라가는 동안
빨개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은,
계단 가장 아래에서 푸욱,
하고 한숨을 쉬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다시 또 빨개진 얼굴로.

계단에는 휠체어를 옮길 수 있는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리프트 맨 위에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공익근무요원이 있었다.
위아래를 번갈아보며
위에 도달하면 재빨리 발을 내딛어야만 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며
나는 결국 다시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게 요즘의 나다.

귀에는 이어폰을 꼽은 채 - 흘러나오는 드렁큰타이거의 애절한 8:45 를 들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걸음으로 한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4호선에서 5호선을 갈아타는 길을 걷다.

5호선 맨 뒤에 타면 광화문에서 바로 계단을 오를 수 있다.
얼마 걷지 않아도 금세 도착할 수 있는 짧은 거리.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 후, 한산한 플랫폼 맨 뒷자리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한 남자가 있었다.

노랗게 염색을 한 짧은 머리카락을 하고 꽤 큰 덩치에 안경을 꼈고
글씨가 아주 작아보이던 잡지를 읽고 있던 그 남자는
휠체어를 타고 있기도 했다.

잠시 후 지하철이 도착했고
그가 먼저 올라타길 바라며 살짝 뒤로 물러섰는데
그는 턱 높이가 다른, 열린 지하철 문과 플랫폼 사이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기관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우리 뒤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다 탈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무도 나와보지 않았다
쾅,쾅,쾅
그는 한번더 문을 두드렸고 나는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그의, 문을 두드리던 손은 멋쩍게 나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뀌었고
그 눈빛은 닫혀진 문 밖으로 사라졌다.

오후 내내,
외롭고 슬펐고,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