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러운 소녀 시절

호어스트의 포스트잇 +79

sm

꿈에서 운전을 했다. 현실에서도, 꿈 속에서도 나는 면허가 없다. 운전을 해 본 경험도 없다.  꿈 속에서의 나는 운전을 하며 달리는데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면허가 없다'는 것을 들킬까봐 운전하는 내내 겁을 먹고 있다. 저기까지만 가면 돼, 신호위반이라도 해서 걸리면 무면허가 탄로날거야, 이게 엑셀인가? 이게 브레이크인가? 꿈 속의 나는 쉴 새 없이 걱정을 한다. 그런 나를 시험이라도 하듯 경찰이 주차위반이라며 다가와 면허증을 요구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당신 정말 경찰이에요?' 라고 묻는다. 그 물음과 함께 그는 사기꾼이 되어 에이, 이러면서 도망을 가고,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심하군. 꿈에서조차.
꿈에서 깨서 든 생각은 그거였다. 운전을 하면서도 긴장했던 그 마음이 너무 생생해서 그 날 아침 일기장에 꿈 내용을 잔뜩 적어두었다. 나에게 면허증을 요구하던 경찰은 어느새 보이스피싱 전문의 중국인이 된다거나, 그래서 내가 들어간 건물 안에는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다는 내용들도 적혀있다. 그들을 만나면서도 생각했던 거 같다. 아, 나가고 싶다... 너무 힘들어... 그치만 나는 그냥 눈을 피하거나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 시간들을 버텨내는 것이다. 꿈에서조차!

오늘 아침 샤워를 하다가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너무 끝도 없이 한참 눈물이 나서 조금 놀랐다. 참으면서 눌러놓았던 것들이 어느 한 마디에 다시 살아났고, 다른 기억들을 마구 끄집어내버렸다.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 괜찮다고 했던 것도, 이해한다고 했던 것도, 그럴 수도 있다는 말도,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걸 안다는 말도 사실 다 거짓말이다. 한번도 괜찮은 적이 없고 이해한 적도 없다. 너무 작은 것에 상처받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까짓것도 이겨내지 못하는 유약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서, 소심한 사람보다는 쿨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참았을 뿐. 웃었을 뿐. 그 기억들이 강펀치를 날렸다. 오늘 하루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화장실에서, 걷다가, 집에서 몇 번이고 더 울었다. 그 표정과 그 말투를 기억하는 내가 싫어서 더 울었다. 초라한 년. 하찮은 년. 자기를 예뻐해야 한다는 둥 말로는 잘 떠들어놓고 나는 나를 보듬어 주지 못했다. 그 사람들의 그 말들 속에 갇혀서,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을 뿐이다. 경멸의 눈빛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이렇게 똑같은 기분으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소심한 건 자랑이 아니다. 안다. 나 상처 받기 쉬운 사람이야, 라는 말이 가진 폭력에 대해서도 안다. 피해자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안 그런 척 하면서 병신같이 실실 쪼개는 거 보다는 내가 소심한 걸 인정하고, 그 순간에 그 불편함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거 뿐이다. 이미 놓쳐버린 수많은 순간들을 붙들고 이렇게 질질 짜는 것 보단 그 면전에서 욕이라도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거지.  너 면전에 대 놓고 욕 잘 하잖아, 라고 물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면전에 대 놓고 욕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가진 진짜 상처를 건드리지 않은 사람들인 거 같다. 상처니 뭐니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내가 한 말들에 상처받은 사람은 더 많겠지. 근데 지금 나의 작은 마음은 그들까지 걱정할 여력은 없는 거 같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 타이밍이라는 것이 중요하긴 중요한 거다. 때를 놓치면 할 수 있던 말도 할 수 없는 말이 되고, 할 수 있던 일도 할 수 없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 요즘은 타이밍을 잘 못 맞춘달까, 놓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것저것 일들은 몰려들고 나도 뭔가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 모든 게 멈춰있는 것처럼 앞으로는 잘 안 나간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주정도 전부터 폭식이 심해지고, 낮술을 안 마신 날이 없고, 담배도 다시 피우고 있다. 이 모든 걸 타이밍 탓으로 돌릴 수야 있겠냐만, 어디서부턴가 계속 놓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못 쫓아가고 있는 거지.


비틀거렸다. 낭떠러지에 간신히 서 있는 기분이 며칠째 지속되고 있었다. 그것을 숨기는 능력이 살면서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누가 민다고 비틀거리는 것이 아니다. 비틀거리고 있으니까 누가 민 게 아닐까 원망해보는 것 뿐. 몇 가지의 일들이, 사실은 작은 일들이었는데, 그래도 화살로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는 것, 뿐.
어릴 때는 그런 내가 참 싫었다. 스무살이 넘어서는 그것을 '예민한 사람'이라고 포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상처받기 쉬운 사람' 이라고 유세를 떨 수 있다는 것도. 연애할 때도, 친구들한테도 참 많이 써먹었었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예전보다 여유있어졌고,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말들도 많아졌고, 솔직해졌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는 밀려밀려 여기 끝에 서 있는 거다. 싫다. 이런 기분

자신의 몸인데도, 어떨 때는 참 진짜 내가 모르고 있다 싶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그런 걸 잘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건강 염려증이 있는 나는 작은 신호에도 크게 반응하는데, 그런 스트레스가 오히려 병을 만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작년에 아빠가 내몸 사용설명서라는 책을 추천해줬었는데 한 번 읽어봐야겠다. 대체 내 몸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가..

이번달부터는 생리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해 놓기로 했다.
이상한 날짜에 시작되었고, 생리통은 어제와 오늘 1-2시간 정도, 묵직한 느낌으로 견딜만한 고통을 동반했음. 저녁을 먹고 나서 잠깐의 메스꺼움이 있었는데 이유를 모르겠고, 알 수 없는 살 덩어리 같은 것이 출몰했음. 몸이 계속 차다는 것도 특징. 초콜릿을 빛의 속도로 먹긴 했지만 다른 때만큼 과식하지는 않음.

엄마와의 대화가 힘든 이유 중에 하나는, 대화의 대부분이 걱정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다. 밥 먹고 다니냐, 추운데 이불은 잘 덮었냐, 옷은 따뜻하게 입고 다니냐, 집에 보일러는 잘 돌리냐, 요즘 돈 없지 않냐 등등. 성질머리가 못된 나는 '내 나이가 지금 몇이냐, 엄마는 내 나이때 애가 둘이었는데, 외할머니가 그런 거 엄마한테 맨날 물어봤으면 짜증나지 않았겠냐!'며 금세 윽박을 질러대고 만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의 잔소리를 몹시 경계하며 조심하지만, 역시 쉽지 않은 것이다. 자식새끼는 아무리 커져도 자식새끼인 것을 어쩌겠는가.
성질머리가 나빠 화부터 내는 나와는 달리 동생양은 새로운 대화법을 개발하였다.
이른바 메롱대화 ㅎ

엄마가 이야기를 하다가 그게 잔소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메롱을 하는 것.
화를 내는 대신 가볍게 혀를 내밀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재미있기 때문에 둘다 이후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가끔 엄마는 '이것마저 잔소리라고 하냐!'라고 항변하기도 하지만, 후훗.
이제 좀더 심도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나.

하지만 자식도 없으면서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나야말로 어쩌누.



+) 짤방은 요즘 한창 술을 들입다 퍼마시고 싶은 마음의 본인을 표현한 것.